난데없이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영국의 날씨는 늘 이런식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빗줄기가 굵었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가리고 옆을 돌아보았다. 릭은 한쪽 눈을 찡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뺨 위로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평소라면 종아리를 툭 차며 게이트를 열길 요구했을텐데, 달리 재촉하고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빗방울로 샤워라도 할듯 고개를 쳐들고 있는 릭의 뺨에서 굳어있던 핏줄기가 녹아 흘러내린 탓이다. 릭은 아예 두 눈을 감고 앞머리가 온통 축축하게 다 젖도록 비를 맞다가 양 손을 벌렸다. 그러더니 아, 하고 입까지 벌렸다. 빗물로 까끌한 목구멍까지 씻어내려 했으나 맛이 그리 좋지는 못했는지 금새 입은 다물렸다. 나는 샐쭉 웃느라 주름진 릭의 눈가를 손으로 훑었다. 다행히 차가웠다.
한참을 코르코바도산에 있는 그리스도처럼 비를 받아내던 릭은 오분이 지난 뒤에야 힐끔 눈동자를 굴려 나를 보았다. 나는 비가 내리기 시작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릭에게서 눈을 뗀 적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자연스레 눈이 맞았다. 뭘 봐. 내가 입모양으로 그렇게 묻자 릭은 대답 없이 웃었다. 나는 릭이 이럴때면 성질이 났다.
릭은 가끔 할 말을 참는 표정을 지었다. 바로 지금같은 얼굴이었다. 눈꼬리를 내리고 미안하다는듯이 웃는 얼굴. 아무리 웃는 낯짝에 침뱉기를 잘 하는 나로서도 저 얼굴에는 차마 검을 뽑거나, 냉소를 보낼 수 없었다. 그저 미간을 좁히고 뭘 웃어, 하고 핀잔을 줄 뿐이다. 무언가 특별한게 있었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 중 하나였다.
"다 젖어버렸네."
"누구덕이라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왜 바보같이 여기 서있소?"
먼저 바보같이 고개를 쳐들고 입까지 벌렸던 게 누군지는 벌써 잊은 모양이었다. 나는 푹 젖은 머리를 대충 손으로 걷어 올리고 릭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릭은 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는 종아리를 문질렀다. 소나기는 조금 전 보단 약한 기세로 툭툭 떨어졌다. 나는 가만히 릭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릭은 약간 추워보였다. 입술이 파랬고, 뺨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고작 오분 소나기를 맞았다고. 이럴때마다 어쩌면 릭이 가까운 시일에, 운이 나쁘다면 내일, 더 빠르게는 이 다음 순간 죽을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꼭 적의 무기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도. 그럼 아마 나는 많이 화가 날것이다. 릭의 연약한 몸뚱이나, 나약한 정신이 밉겠지. 그리고 평생을 궁금해하며 살지도 모른다. 그때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를.
나는 릭의 턱 아래 고인 빗물을 훔쳐냈다. 릭은 내 손을 잡아 끌어 손등에 입술을 맞추다가 베시시 웃었다. 알아서 잘 모실게. 고맙다는 말이 생략 된 농담에는 일부러 웃지 않았다. 릭이 열어놓은 게이트는 리버포트를 목적지로 하고 있었고 나는 그 위에 올라가는 대신 서서히 비가 멎어가는 하늘을 올려다 본 후 입을 열었다.
"잠시 걷겠나?"
"좋지."
어깨를 마주하고 걷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님을 알아가는 나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