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져릭 할로윈

000 2015. 11. 8. 19:34



회사의 꼬마가 하얀 천을 뒤집어쓰고 찾아온 것은 저녁 무렵의 일이었다. 평소 양갈래로 묶고 다니던 머리까지 풀어헤치고 꼬깔모자를 쓴 아이는 자신을 마녀라고 소개했다. 양 손에 하나씩 작은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과자를 주지 않으면 무시무시한 장난을 칠거라구요!" 바구니를 내밀며 깜찍하게도 외치는 모습이 귀여웠다.

"해피 할로윈."
"해피 할로윈이에요 벨져경!"

바구니에는 흘러넘칠듯 사탕과 초콜렛이 쌓여 있었다. 긴 치마자락을 질질 끌고 우드시티를 온종일 돌아다녔을 아이는 여전히 활기찼다. 나는 오늘만 네 번을 만난 각지의 마녀들에게 미리 사놓은 과자를 챙겨주었다. 아이는 과자를 받고도 가지 않고 어쩌다 자신이 마녀를 하게 되었는지, 지금 입고 있는 옷이 어떤 옷인지를 떠들었다. 연합의 남자애는 할로윈 분장이 하기 싫어서 아침부터 뛰쳐나가 놀고있더라는 말을 할 때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숨을 죽이고 킥킥거리기도 했다. 나는 열린 현관문 뒤로 보이는 유령들의 행렬을 지켜보며 아이의 말을 귀에 담았다.

"아, 너무 늦었다!"

혼자서 재잘대던 아이가 손목 시계를 확인하곤 하던 이야기를 대충 얼버무렸다. 뭐 회사의 사람들은 이런 행사에 박하다, 어쩐다, 하는 애 답지 않은 이야기였다. 나도 아이를 따라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여덟시였다. 어린애가 혼자 돌아다니기엔 조금 늦은 시간이었고, 아이는 마녀답지 않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나는 늘 세트처럼 꼭 붙어다니던 다른 여자애는 어디있느냐는 말을 물을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그것은 왜 바구니를 두 개나 들고 있느냐는 질문과 다를 바 없을 터였다.



할로윈 데이의 마지막 손님은 큰 형이었다. 사자처럼 뚝뚝한 표정으로 현관문 앞에 선 큰 형은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코트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운 사탕이 채 모습을 숨기지 못하고 꽁무니를 내밀고 있는 것이 우스워서 몇개 남지 않은 과자를 쥐고 줄까, 물었다가 너나 먹으라는 대답을 들었다. 형은 나를 밀치고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아직 집에 들리지 않았는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칼은 차고있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형은 더이상 칼을 들지 않았다. 이글은 그 사실을 아쉬워했다. 왜? 하고 억울하게 묻는 이글을 보는 형의 눈은 많은 것을 숨기고 있었다. 말 하고싶지 않았던 게 아니란 걸 안다. 다만 말할 수 없을 뿐이라고. 너도 곧 알 수 있을 거라고. 나는 형의 긴 셔츠 속에 숨겨진, 바짓단 아래 감겨있는 하얀 붕대를 떠올렸다.

"하도 소식이 없기에 와 보았다."
"고리타분한 편지도 아니고 이렇게 직접 와주다니, 영광이군."
"웃기는군. 네 놈이 그걸 보기는 하냐?"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선 할 말이 없었으므로 입을 다물었다.

"문은 왜 열어두고 있었고."
"더워서."

바라보는 눈빛이 여간 사납지 않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아버지의 행세를 하기 시작한 형은 틈만나면 이글과 나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어쩌면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 '형제들을 잘 부탁한다' 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전쟁의 막바지에 오스트리아에서 날아온 전보는 오로지 형만이 알고 있었다. 이글은 그런 짐을 질 재간이 없고, 나는 이미 짊어진게 너무 많아서 그래서 차마 알리지 못했노라고. 우리는 아무도 형을 원망하지 않았다. 사람은 다 죽어. 이글은 덤덤하게 말했지만, 가장 많이 울었다. 그러고보니 다음주가 아버지의 기일이었다.

"고향에 내려가자는 말을 하러 온건가?"
"굳이 말을 해야 내려 올 거였나? 네가 그정도 불효자인줄은 몰랐다만."
"아버지가 들으면 웃겠군."

형은 아버지의 유언을 착실히 이행했다. 이글을 대신해서 다리 한 짝을, 나를 대신해서 팔 한 짝을 잃어가며. 나는 형의 그런 고지식함이 눈꼴시리다가도 이따금 그것이 위대한 업적을 이룬 위인같아 보이기도 했다. 나중에 아버지의 옆에 묻히는 날이 오더라도 눈을 마주하기가 부끄럽지 않도록 애를 쓰는 것 같아 보였다.

"그냥 네 생각이 나서 들러본거야."

그렇게 말하는 형의 어깨가 좁고 외로웠다. 회색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나는 형이 들어올 때 닫아 놓은 현관문으로 눈을 돌렸다.

"벨져. 다음 주에는 다 같이 모여서 식사라도 하자."
"그렇게 하지."

자리에서 일어난 형은 벗어두었던 코트를 챙겨입고 불룩한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었다. 할로윈 선물이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장난스러웠다. 나는 형의 손바닥에 올라간 사탕 중 단 하나만을 챙겼다. 형은 다음 주에 꼭 보자고 손을 흔들며 현관문을 열었다. 형은 왼다리를 절었고, 형은 더이상 오른손을 자유자재로 쓰지 못했다. 아버지의 유언이 형의 몸 구석구석에 남아 있었다.

사람의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 내게는 아직도 또렷하지 않다. 아버지를 대신해 가문을 챙기려드는 형이나, 친자매 같던 동생의 몫까지 함께 과자를 얻어 다니는 꼬마가 과연 어떤 마음인지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은 다 죽는데 그건 나도 아는데,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잖아? 우리는 죽이는 법만 배웠지 남는 법은 배우지 않았어. 매일 같이 관리했던 검을 하루 아침에 창고에 처박아 둬야 하는 신세가 되었을 때, 빈 자리를 만져야만 누군가 있었음을 알 수 있을 때, 행복하게 살으라는 유언이 땅바닥에서 기어나온 족쇄와 같이 이어져있을 때.

혼자 해쳐나가야만 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잘가 형."

오늘은 할로윈이자 종전으로부터 꼭 이 년째 되는 날이다. 할로윈은 망령들이 인간의 몸을 빌리러오는 날이라던데. 이 년이면 그래도 아직은 여행을 좋아하는 네가 이 땅에 발을 붙이고 남아 있진 않을까 문을 활짝 열어두고 한아름의 사탕을 쌓아놓는다. 미안하지만 나는 불행하게 살고 있어. 형 같은 사람이 되지 못해서 미안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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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iece of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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