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릭

000 2015. 11. 8. 19:36



우리가 너무 어렸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을 테지만 미처 덜 여문 마음을 나누었다는 사실은 반박하지 않길 바라오. 프롬 알.

그 문장을 보았을 때 방금 먹은 아침이 속에 얹히는 기분이었다. 어금니가 꽉 다물렸다. 나는 더 볼 것도 없이 회색 편지의 첫머리만 읽고 당장에 그것을 찢었다. 열 두 갈래로 산산조각을 낸 뒤에야 속이 풀렸다. 숨을 돌리자 끝부분이 찢어진 갈색의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우표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보낸 이는 없고, 받는 이만 있다. 나는 가장 위에 것부터 하나씩 우표를 뜯어냈다. 열 개의 우표를 뜯어내는 동안, 편지는 세 번 달이 바뀌었다.

"멀리서도 보냈군."

식탁에 어지러진 편지는 버릴까 태울까 고민하다가 한조각씩 씹어먹었다. 질긴 종이가 너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자 짜고 신맛이 났다. 이건 손가락, 이건 팔꿈치, 이건 입술, 코, 뺨, 머리카락. 목구멍에서 올라가는 것과 내려가는 것이 충돌한다. 어쩌면 그것들이 길을 열어주었을지도 모른다. 네 숨이 붙어있는 편지를 양분삼아 더 커지기 위해.

"머저리."

우리는 선 끝에서 겁먹거나, 돌진했다. 게다가 나는 무시하고 너는 외면하는 식이었다. 둥글게 감겨서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원래 그랬던 것 처럼 멀어졌다. 거기까지 딱 삼년이 걸렸다. 그리고 사개월이 더 흘렀다.

한달 째에는 네가 미웠고, 두달 째에는 싫다가, 세달 째에 꽃을 씹어 삼켰다. 지금은 그냥 네 목을 조르고 싶다. 가끔은 내 목을. 흥분한 맹수를 달래듯 목에 손을 올려놓고 있노라면, 끌어오르던 토기가 삭아들었다. 목구멍을 뜨겁게 달구던 게 억지로 넘긴 침과 함께 다시 내장 속으로 역류한다는 것은 대단히 역겨운 감각이다. 이상한 부분에서 눈치가 빠른 이글은 내게 그래도 어떤 꽃인지는 좀 궁금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궁금하지 않았다.



"왜 헤어졌어?"

이글은 종종 내가 일하는 기사단의 사무실에 찾아왔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의미 없는 이야기를 떠들었다. 주제는 너무 광범위해서 축약이 불가능했다. 개중에서 심심하면 꺼내드는 이름이 하나 있었는데, 오늘은 그 얘기를 하기 위해 찾아온듯 했다.

"잘 지냈잖아? 같이 살지 않았어?"

나는 이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러자 이글은 벌떡 일어나 내게 가까이 다가와 몸을 치대고 서류를 손으로 헤집었다. 미친새끼가. 나는 작성하고 있던 서류의 순서가 완전히 뒤바뀌는 걸 보다가 책상에 기대 놓았던 두개의 검을 들어 배를 퍽, 밀어냈다.

"왜 헤어졌냐고."
"필요해서."
"근데 왜 궁상 떨어?"

이번에는 진짜 화가 나서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한 마디만 더 하면, 입부터 도려낸다. 이글은 항복을 선언하듯 양 손을 들어올리더니 다시 소파에 드러누웠다. 제 집 안방처럼 구는 꼴이 아주 흉악스럽다. 나는 놈이 조용해진 틈을 타 서류를 정리하고 펜을 쥐었다.

"형 그거, 참으면 병 된대."

물론 오래가지는 못했다. 드러누운채로 좌탁에 놓인 장식품을 만지작대던 놈은 닫고 있던 입을 지익 열고 빈 호리병을 손가락으로 툭 밀었다.

"차라리 그냥 다 게워내지 그래."
"걷어 차야 닥칠건가?"
"걱정을 해줘도 씨발, 그러니까 차이지. 형 죽으면 시체 졸라 예쁘겠다 아주."

식도에 콱 막힌 꽃무리를 물과 함께 넘기던 나는 눈을 치뜨고 이글을 노려보았다. 놈의 말을 빌어 차라리 이것들이 병이 되어 사라진다면 고맙겠다.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쓴 독인데, 멎을 낌새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빈도가 잦아질 뿐이다. 이번 일주일만해도 마흔 번의 꽃을 삼켰다.

"에라이 진짜. 이거나 받아."

괜한 신경질을 부리던 이글이 품 속에서 작게 접은 종이를 꺼내든다. 손바닥만한 크기였고 활자가 빼곡히 들어차 있는 것으로 보아선, 어떤 책의 단면 같았다. 그게 뭐냐는 물음 대신 날을 세우고 있던 눈을 풀자 알아서 말을 잇는다.

"루이스가, 그 뭐냐."

무슨 잡지에서,   릭 톰슨을.

그 이름을 듣자 갑작스레 시야가 좁아진다. 또 귀가 먹먹하고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목을 움켜잡았다. 최선을 다해서 식도를 조이고 가슴을 두들겼다.

"형 듣고있어?"

마흔 두번 꽃을 삼킨다. 눈에 보이는 흔적을 남겨놓고 싶지 않았다. 무게도, 형태도, 소리도 없이 만들어진 감정은 은연중에 체류해야 하는 법이다. 입 밖으로 비집고 나올 틈도 없이. 마흔 세번 꽃을 삼킨다.

네 말을 빌어 우리가 어리지도 않았는데 어린 사랑을 나누었다면 그게 이별의 이유가 되었다면. 어째서 나는 한 살의 짝사랑을 이토록 길게 끌고가야만 하는 걸까. 미련으로 폭식을 하고 뱃속에 네 무덤을 만들고. 이게 과연 덜 여문 마음이 맞기는 하냐고.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면, 나도 네 말을 조금은 이해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마흔 네번 꽃을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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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Piece of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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