릭은 벨져와 일주일에 세 번을 만났다. 그 중 두 번은 안타리우스나 액자에 관련 된 일이었고 한 번은 사적인 만남이었다. 주로 식사를 함께 하거나, 커피를 함께 마셨다. 달리 여가를 즐길 일 없이 바쁘게 사는 벨져가 릭에게 기꺼이 제 시간을 할애 해주는 이유는 릭이 외로움을 많이 타는 탓이 컸는데, 사실 릭은 벨져가 아니라도 만날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구태여 그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릭이 벨져에게 큰 호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리라.
릭은 벨져를 만나는 게 즐거웠다. 매번 딱딱한 태도를 고수하는 미청년이 자신의 취향에 맞춰 커피를 마셔주거나 먹어 본 적 없는 음식에 띠거운 표정을 하면서도 포크를 입에 무는 것이 좋았다. 갑주가 붙은 제복이 아니라, 편한 사복 차림으로 나오는 것도 좋았다. 벨져는 음주를 할 때 담배를 피웠고, 릭은 식사를 하고 나서 담배를 피웠다. 그런 미묘한 차이를 알아가는 점도 재미있었다.
“벨져어.”
오늘은 함께 오페라를 보기로 한 날이었다. 일찌감치 약속장소에 도착한 릭이 근처의 카페에서 커피 두 잔을 사들고 와 야외 테라스에 앉아 있을 때 벨져가 피곤한 얼굴로 나타났다. 얼굴이 왜 그리 퀭하냐는 릭의 질문에 잠시 눈을 흘긴 벨져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그렇다고 답했다. 끽해봐야 삼 사 일 밤을 샜나, 생각했던 릭은 이 주 내내 하루 한 시간씩 쪽잠만 잤다는 벨져의 말에 기함을 했다. 자세히 보니 눈 밑에 그늘이 진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이 저 바쁜 기사단장님의 휴일을 아무렇게나 남용하는 건 아닐까 잠시 미안해졌다. 말이 없어진 릭을 가만 보던 벨져가 릭의 신발코를 툭 찼다.
“안 졸아.”
약간 짜증스런 얼굴이었지만, 피곤한 벨져 홀든은 새롭게 섹시한 맛이 있었으므로 릭은 그냥 모른 척 벨져를 끌고 들어가기로 했다. 릭이 직접 표를 구한 오페라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각색한 것이었다. 벨져는 본격적인 공연에 앞서 릭에게 어릴 때 읽었던 원작에 대한 감상이나, 극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인물에 대해 몇 가지 첨언을 얹기도 했다. 릭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냥 가장 가까운 날짜에 있는 공연을 꼽은 것이라 파우스트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오페라는 릭이 해석하기엔 좀 난해한 내용이었지만,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가면서 까지 사랑을 사고 싶어 하는 욕망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3막에 나온 꽃의 노래였다. 릭은 높고 고운 목소리가 전달하는 절절한 가사에 덩달아 벅차올라 벨져를 돌아보았으나 졸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이는 어디에 갔는지 릭의 옆자리엔 팔짱을 끼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눈을 감고 있는 아름다운 미청년뿐이었다.
다만 꾸벅꾸벅 졸고 있는 벨져가 쉽게 볼 수 있는 구경거리는 아니었기에 릭은 남은 오페라 감상을 포기하고 열심히 벨져를 뜯어보았다. 평소엔 조금만 오래 쳐다보아도 짜증을 내니 이럴 때 보아야 했다. 릭은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공연장이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이 예뻐라. 지켜만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애달파서 손을 들었다가 차마 흘러내린 머리를 넘겨줄 용기도 없어 다시 무릎 위에 포개놓았다. 벨져어. 차마 소리 내어 부를 수 없는 이름은 속으로만 반복해서 뇌까려 본다.
나의 심장은 밤낮으로 사랑 때문에 시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