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공성전 (ft.분조장 벨져)
1.
아 영, 감이 좋지 않군. 점프기어에 발을 디디기 전, 적의 조합을 확인하기 전, 그러니까 아군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부터 릭은 패망의 향기를 느꼈다. 이 조합은 망했어. 차라리 오원이 나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심각했다. 우선은, 만나기만 하면 저를 쪼아대느라 바쁜 벨져 홀든이 있었고 일 티어 회피기라는 잔나비만 믿고 앞선에서 나대는 것이 취미인 하랑도 있었으며 매 공성마다 숨 막히는 침묵과 핑도 없이 불나방처럼 적진으로 뛰어드는 강직함으로 릭을 힘들게 했던 티엔도 있었다. 마지막은 그냥 보기만 해도 너무 즐거워서 피곤해지는 이글 홀든이 장식했다. 적어도 한 사람이라도 좀, 나와 잘 맞는 부류의 사이퍼로 넣어주었으면 안 돼? 릭은 파란 가상의 하늘에 대고 속상함을 토로해보았지만, 어찌되었건 랜덤의 신은 공정했다.
“아...”
“어? 미국인 아저씨가 웬일이래? 매번 적으로만 만나더니.”
“적은 드렉슬러를 제외하면 사거리가 특출나게 긴 사이퍼는 없지만 기습적인 이니시가 가능한 조합이니 라인전은 포기하고 타워링으로 간다.”
“노장 노모 극방.”
“1장 1모 방밸.”
“3장 2모 극방!”
훌쩍 점프기어를 타고 내려간 네 사람을 가만 내려다보던 릭은 울상이 된 얼굴로 뒤늦게야 점프기어 위에 올랐다.
“느려 터졌군. 네 덕에 적 원딜은 120코인을 더 벌었다.”
그리고 벨져에게 욕을 먹었다. 아니 120코인 더 벌어서 장갑이라도 하나 더 찍었대? 벌써?! 릭은 시작과 동시에 떨어진 잔소리에 벌써 머리가 아득해짐을 느꼈다. 내가 숨만 쉬어도 맘에 안 들어 할 거야. 그냥 탈주할까. 버릇처럼 럭키 코인을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던지고 받으며 열심히 센티넬을 향해 달린 릭이 그런 고민에 빠진 동안 그와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아군의 3번 타워에서 싸움이 붙었다. 아하하하. 차마 마무리를 하지 못하고 끊긴 쾌활한 웃음소리에서 첫 개싸움의 쓰라린 패배를 느낄 수 있었다. 릭은 구석에 있는 통로를 모먼트 샷으로 툭툭 갈겨본 후 열심히 타워를 긁었다. 혹시 모르니 데스스타는 아껴두었다. 맵에서 로라스가 안.
“형씨는 왜 왔어.”
이글은 정확히 오초 뒤에 제 뒤를 따라온 릭에게 물었다. 릭은 네 웃음소리 때문에 용성락 소리가 안 들렸다는 말 대신 하하. 입으로만 웃었다. 릭은 서른셋의 성인이었고, 이글은 열넷이라고 보아도 무방한 스물넷이었으니까. 너 때문에 라는 말을 하는 순간부터 저 열넷 같은 스물넷이 어떻게 돌변할지 몰랐기 때문에.
아군의 타워가 파괴되었습니다. 릭은 시스템이 전해주는 메세지를 들으며 코를 훌쩍였다.
“으응, 로라스의 궁에 찍혔소.”
“저런 조심해야지.”
쯧쯧. 먼저 리스폰이 끝난 이글이 점프기어를 타기 전 어리숙한 아저씨에게 충고 같지도 않은 충고와, 그보다는 확실한 혀 차는 소리를 냈다. 어차피 똑같이 리스폰 창에서 내려가는 숫자나 보고 있었으면서! 릭은 잠시 울컥했지만, 다시 참았다. 그 와중에 적의 3번 타워가 부셔져서 코인이 들어왔다. 어찌어찌 타워는 깬 모양이었다. 릭은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하고 자신을 달래며 데스스타링을 하나 올렸다.
중앙 타워에 도착하자 각각 왼쪽과 오른쪽의 언덕을 장악한 벨져와 티엔이 시야를 보고, 타워 뒤에 잔나비를 깔아놓은 하랑이 열심히 타워를 때리고 있었다. ㅡ이글은 멀찍이서 춤이나 추다가 장작의 쿨이 끝나면 장작을 한대씩 치고 갔다ㅡ 기동력 최하위라는 대대적인 스펙답게, 릭이 중앙 타워에 도착 했을 때 적의 중앙 타워는 절반 정도가 망가져 있었다. 릭은 긴 사거리와 모션이 크지 않은 즉발기라는 점을 이용해 타워의 언덕부분에 데스스타를 까는 것으로 적을 위협했다. 벨져가 일전에 알려준 것으로 유용하게 써먹고 있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벨져는 여러 전장에서 뛰어본 실전파라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풋내기 여행자를 끌고 모의 공성을 함께 해주던 것도 벨져였다. 그 덕에 릭은 지금까지도 모의 공성에 참전할 수 있었다. 이제는 꽤 멀게 느껴지는 추억에 젖어있던 릭이 언덕에서 든든하게 아군을 지키는 벨져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벨져 나 아직 궁 있소!”
“그렇겠지 죽었으니까. 어차피 네 궁은 홀딩용이니 스텔라가 기어를 켜면 그 위에다 깔기나 해라.”
릭은 잠시 몸의 방향을 틀어 벨져에게 주먹을 뻗었다. 어차피 아군이라 맞지는 않았다. 언덕의 끝에서 검을 깔짝대던 벨져가 미간을 찌푸리자 릭이 가볍게 사과했다. 어휴, 방향이 잠깐 틀어졌소.
2.
40분에서 시작 된 공성전의 시계은 째각째각 거꾸로 흘러 30분이 되었다. 그 동안 운 좋게 아군 중앙 타워 뒷쪽에 뜬 트루퍼를 이글이 홀로 손 쉽게 잡았다. 이번 공성은 무난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유리한 위치라고 해도, 적 팀에 드렉슬러가 있는 이상 타워링은 비등비등 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랑은 그게 불만이었다. 아니 시발 우리 팀이 이기고 있는데, 왜 안 싸우는 거요? 적 팀은 드렉슬러의 분열창만 가지고 타워링을 했고 하랑은 가끔가다 철거반에게 맞고 자신에게까지 날아온 창의 파편에 덩달아 맞아 꽈당 엉덩방아를 찧었다가 일어나면서 욕지거리를 뱉었다. 하랑은 이글만큼이나 호전적인 성격으로 꽝 붙는 한타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여담이지만 장소가 긴 통로면 두 배로 좋아했다. 아무튼, 그런 하랑에게 지금의 상황은 무척이나 지루했다.
“적팀이 절대 안 싸워주려고 할거다.”
“그럼 뒤로 돌아. 탱이 몸 대면 되잖아?”
그 말에 언덕과 바닥을 오가던 두 탱커의 눈이 삐죽 솟았다. 하랑은 머쓱하게 웃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긴 했다. 적 팀에는 린과 스텔라가 있었다. 벨져와 티엔이 적군의 중앙 타워 뒤로 진입하면 장벽으로 앞선 원딜의 공격을 차단해 버릴거고 바로 초진공흡기로 티엔과 벨져를 묶을 것이다. 그 다음 상황이야 뻔했다. 적의 또 다른 원거리 딜러인 나이오비가 초열지옥을 뿌리기라도 한다면 릭이 무리해서 궁을 써야했고, 궁을 쓸 때엔 그 어떤 움직임도 취할 수 없는 릭에게 로라스의 용성락은 카운터 스킬이나 마찬가지였다. 릭이 죽으면 다음 목표물은 하랑 자신이 되겠지. 하랑의 머릿속에서 굴러간 급습 시뮬레이션이 딱 그곳에서 멈추었다.
“내가 잔나비 이니시 해줄까?”
그리고 생각해낸 작전이 저것이었다. 벨져와 티엔은 동시에 하랑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곧장 튀어나오는 왜애, 하는 반항은 한 귀로 담고 한 귀로 흘렸다. 작전이라곤 그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전부인 릭마저도 그건 좀 아니라 생각했는지 곧 있으면 트루퍼 싸움을 해야 할 거라고 하랑을 달랬다. 조선의 작은 소년이 떠들어댄 어설픈 작전에 관심이 있는 것은, 오로지 이글 홀든 뿐이었다.
“야 너보단 내가 나을 걸? 내가 미끼 해줄까?!”
가뜩이나 장작 쓰고 분열창 대신 맞아주는 것밖엔 할 일이 없던 이글은 동의를 구하는 말과 동시에 언덕과 언덕 사이, 마주본 두개의 포탑이 동시에 포를 쏘는 곳으로 달려 나갔다. 어찌나 빠른 발놀림인지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하랑은 말릴 생각이 없었고. 물론 이글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아예 뛰어들기 보단, 타워 뒤에 숨은 드렉슬러에게 뱀 그림자나 그어볼까 했는데.
“부녈창!!”
뇌안도 켜는 걸 깜빡했다.
그리고 트루퍼가 떴다.
승리는 그날 트루퍼의 신이 누구의 편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점지되는 것이라, 이글은 리스폰 창에서 펑펑 터지는 아군 타워를 보며 깔끔하게 인정했다. 와, 좆 됐다. 어떻게 2단계에서 공지가 뜨냐. 혼자 중얼거린 말에 덩달아 리스폰에 함께하게 된 티엔이 아직 할 수 있다. 라고 기백을 담아 말했다. 과연, 양기와 음기를 모두 지닌 남자다운 말이라고 이글은 생각했다. 근데 적 1번 타워 아직 남아있는데 저건 어떻게 부술 거래? 티엔은 싸워 이긴 뒤에 부순다. 라고 말했고 무전기 너머로 닥치라는 벨져의 면박을 들었다.
3.
그 후로는 적당한 눈치싸움과, 조잡한 개싸움이 몇 번 이어졌다. 릭은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분열창과 투창의 공포에 시달리며 사이드의 센티넬을 수급했다. 하랑은 그 와중에도 적의 센티넬을 뺏어먹겠다고 빨빨대며 뛰어다녔고, 이글은 그 뒤를 따라다녔다. 야 나도 한입만. 좋아 붙어! 이글의 데스 수가 3을 넘겼을 때 다시 한 번 트루퍼가 떴다. 그 사이 DT로 시야를 확보해 중앙에 진출하는 것에 성공한 벨져가 적군의 통로 쪽으로 기어들어가 돌아오지 않는 두 사람에게 딱 두 번 핑을 찍었다. 야, 오라고. 들리는 소리는 핑핑. 하는 청량한 종소리뿐이었지만 릭은 그 속에 숨겨진 살벌한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철거반만 잡고 갈게!”
“나 이거 먹으면 2티야 생존 확률 두배!”
“내건데.”
“뭔 소리요 형씨?”
지잉지잉. 두 사람은 저 멀리 적군의 5번 타워 근처에서 나오는 철거반 덩어리를 향해 거침 없이 위험 핑을 찍었다. 릭은 뚝심 있게 언덕과 사이드를 돌아다니는 벨져에게서 어떠한 한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저, 모여 있는 철거반에서도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는데 어쩐지 불길했다. 왠지, 죽을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마치 독이든 만찬 같다고 해야 하나.
“발경!”
“놀래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미니맵을 지켜보던 릭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옆에서 나타난 티엔 덕에 소스라치게 놀라 단 번에 20m를 달렸다. 무공을 익힌 자라 자꾸만 소리 없이 튀어나오는데 그때마다 적에게 맞아 죽기도 전에 심장마비로 죽을 것 같았다. 티엔은 릭이 그러던 말던 열심히 철거반과 싸우고 있었다. 그저 타워를 향해 달려드는 철거반에게 최선을 다해 발을 뻗고 팔을 휘두른다. 그럼에도 철거반은 잘 죽지 않았다. 릭은 어쩐지 그 모습이 안쓰러워, 디멘션 점프로 데미지를 더해주었다가 철거반이 소극적으로 휘두른 해머에 맞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아. 진짜. 판정.
그 사이에 여전히 적 기지 가까이에서 옥신각신 싸워대던 두 사람은 그 근처에서 잠복 중이던 스텔라에게 물려 사이좋게 죽었다.
그리고 다시 트루퍼가 떴다.
4.
릭은 모의공성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 어떠한 시스템, 그러니까 가상임을 처음 알았을 때 '뭐 그렇게까지 해서 싸워야하오?' 하고 진심을 담아 짜증냈지만 지금 생각하면 가상의 공간이라는 게 그렇게 다행일 수가 없었다. 신의 한 수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만약 가상의 공간이 아니었더라면, 벌써 아군 기지를 감싸고 있는 방벽들은 성난 벨져 홀든의 칼질에 제 모습을 갖추고 있기 어려웠을 테니까. 릭은 아군 와이존을 돌아다니다가 눈에 보이는 오브젝트만 있으면 일단 양 검을 휘두르고 보는 벨져를 지켜보다가 조심스레 이름을 불렀다.
“벨져어.”
매정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릭은 눈치껏 같은 이름을 두 번 부르는 대신 헛기침과 함께 몸을 돌렸다. 한 번 더 부르면 다음 타겟은 2단 상자도 난간도 자동차도 벽도 아닌 바로 나겠구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늘 벨져는 굉장히 날이 서있었다. 원래도 좀 뾰족한 타입이긴 했지만 오늘은 더했다. 적에는 린이 있었고, 린이 있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물려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근데 딜러들은 아무렇게나 쳐 돌아다니다 물려죽기나 했고, 릭이 쓸모없다는 것쯤이야 예전부터 몸소 익혀왔으니 알고 있었는데 티엔 너 마저. 게다가 이번 공성을 지면 삼연패 째다. 사실 이게 제일 빡이 쳤다. 내가 삼연패를 하다니. 아무리 하향을 당했어도 나는 벨져 홀든인데. 벨져는 난간 벽에 대고 칼을 날렸다. 아오, 열 받아, 아오, 빡쳐. 검을 휘두르는 박자에 맞춰 이를 갈아가면서.
연이어 트루퍼를 뺏긴 덕에 시야에서 밀려 센티넬을 수급하는 것조차도 힘겨웠다. 하랑과 이글은 반성의 기미도 없이 기지 한 가운데서 서로 너 때문이네, 아니 너 때문이네 하는 식으로 서로에게 열심히 평타와 스킬을 낭비하고 있었다. (릭이 보기엔 즐거워보였다) 티엔은 여전히 벨져의 뒤를 따르거나, 아니면 아예 반대편으로 돌아 상황을 보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싸움이 생길지 모르니 가까운 곳에서 백업할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말에도 이글과 하랑은 응, 알았어. 하는 대답뿐이었다. 벨져는 점점 말이 없어졌다. 티엔이야 원래 말이 없으니 상관없었으나 벨져는 이래저래 명령을 내리길 좋아하는지라, 공성의 승패와는 상관 없이 공성이 끝나기 직전까지 상황에 맞는 오더를 내리곤 했다. 심지어 적군 5전광에 HQ만 남아도 ‘HQ를 부셔라' 하고 말을 할 정도였다. 근데 그런 벨져가 말이 없다는 것은, 딱히 무얼 말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잘 풀리고 있다거나 아니면 벨져의 기분이 매우매우매우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기분이 나쁜 벨져 홀든을 달랠 사람은,
“벨져 요기, 이거 철거반 드시오. 내가 일부러 모아놨어!”
릭 밖에 없었다.
릭은 기지 가까운 곳에 뭉쳐있는 라인에 핑을 찍었다. 요기요기. 연합의 어린이처럼 깜찍한 말투였다. 이쯤 되면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남이 보기에도 흉할텐데. 그 증거로 근처에 있던 하랑이 정색을 하고 이곳을 돌아보는 시선이 느껴졌으니까. 그러나 가장 가까이에 있던 벨져에게선 아무런 말도 혐오가 어린 시선도 돌아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그딴 말투 하지 말라 면박을 먹일 만도 한데, 아무런 말도 없이 철거반 무리에 가까이 다가왔고 릭은 그게 더 무서웠다.
“와 꿀립. 고마워 작은 형!”
그가 섬광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그보다 조금 뒤에 따라온 철없는 막내가 멀찍이서 칼을 휘둘렀다. 릭은 등 뒤에서부터 서늘하게 다가오는 날 선 바람의 기운에 어깨를 굳혔다. 아니 이것은, 백로 떨구기와 함께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다는 홀든가의 비기이자, 다이무스와 이글이 쓸 수 있는 유일한 원거리 스킬이며.
“아.”
다 같은 홀든가의 아들 임에도 벨져만 쓸 수 없다는 장작 쪼개기.
정해진 판정 상 넘어진 상대에겐 섬광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제 이런 사사로운 일에는 성질을 내기도 싫어서 벨져는 그저 이글을 한 번 노려보고 체력이 얼마 남지 않은 철거반에게 그믐달 베기를 썼지만 1장 밖에 찍지 않은 탱커에게선 달리 좋은 데미지가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이글은 남은 철거반마저 초승달 베기로 독식한 뒤 유유히 사라졌다. 야, 나 이제 2바지다. 릭은 깔깔 웃는 이글을 한 번, 그 자리에 우뚝 서있는 벨져를 한 번 보았다가 저 멀리서 한 차례 다시 몰려온 철거반을 주먹으로 툭툭 쳤다. 실수로라도 내 동행인님 때리지 마시오. 가뜩이나 무척 성질이 더러운 사람인데 지금 엄청 화나기까지 했거든?
5.
공성전은 얼핏 망한 것 같아 보였으나, 이상하게도 한타에선 나쁘지 않은 승리를 끌어냈다. 물론 릭은 싸움마다 처절하게 죽었다. 벨져의 말을 들어 스텔라의 궁극기인 기어 위에 궁을 깔아놓고 있으면 머리 위로 한기가 스쳤다. 창을 뿌리던지 창을 든 사람을 갖다 박던지 하나 만 해…. 릭은 유성창과 용성락을 동시에 얻어맞고 일초 컷을 당한 뒤 리스폰 창에 쓸쓸하게 앉아 남은 아군을 지켜보았다. 제 작은 형 것 까지 싹 다 뺏어먹고 큰 이글은 그래도 적 원딜을 자르는 것으로 어느 정도 그 값을 했고, 촐싹거리는 게 전부인 줄 알았던 하랑도 한타 때에는 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아무것도 못하고 죽은 것은 릭 뿐이었다. 릭은 조금 심드렁한 얼굴로 벨져를 보았다가 방린과 함께 숟가락 대전을 벌이고 있는 티엔을 보았다가 적은 체력으로 살아나온 로라스를 놀리고 있는 하랑과 이글을 보았다. 잘 쓰이지는 않는 기능이지만, 모의 공성에선 아군 뿐 아니라 적군도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통신이 있었는데 되도록 쓰지 않는 것을 권장했다. 서로의 감정이 상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이글과 하랑은 타인의 감정을 고려하는 이들은 아니었고 또 하지 말라는 건 더 열심히 하는 성격이었다.
[나는 빡빡이다 세 번 외치면 살려는 드릴게]
[샤샤!]
티엔은 린에게 망치로 두들겨 맞는 와중에도 한숨을 쉬었다. 이 하랑………. 벨져는 신경쓰지 않았다. 도망간 나이오비를 쫓느라 정신이 없었다.
[…….]
오늘의 불쌍한 사냥감이 된 로라스는 일 대 일로 붙으면 별것도 아닐 것들에게 열심히 평타로 한 대 씩 맞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는. 그 순간 이글과 하랑의 손이 잠시 멎었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곧장 검룡의 심판으로 방향을 틀어 보려 했으나.
[꺼졍. 출!]
서생원에 맞고 죽었다. 무척이나 서러운 죽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릭은 덩달아 서러워졌다. 리스폰이 끝나기 까진 10초가량 남아 있었다.
“릭 내려오면 바로 게이트를 열어라.”
“…내가 궁받이 해줘서 이겼소. 고맙지!?”
“개기지 말고.”
“으응….”